금방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아, 우산을 가지고 나왔어야 했나. 하고 생각했다.
좀 늦을 거 같으니 들어갔다가 십분 후에 나오라는 말을 들었었다면,
...아니 아마 그래도 나는 안 가지고 나왔을 거다.
어차피 동네에서도 하늘은 내내 흐렸다.
인중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이다.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 따위가 마스크를 뚫었을 리 없다.
비 오는 날의 70퍼쯤은
우산이 없는데 비가 내려요. 의 상태인지라
그냥 비를 맞고 말지 우산을 사는 법은 거의 없는데
오늘은 만약 비가 내리면
아주아주 예쁜 우산을 사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네 개의 우산을 무척 아낀다.
유니버셜에서 사 온 스누피 우산
투명한 벚꽃 우산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려서 샀던 보라색 우산
그리고 노란 우산
벚꽃 우산은 비닐이라 내구성이 개똥이기 때문에
같은 우산을 세 개나 샀다.
사실 두 번째 산 건 배송 오자마자 밍이가 물어뜯어서 못 썼다.
(거의 대부분 벚꽃 우산이 차지하긴 하지만)
우산마다 내 덕질의 기억이 생생하게 묻어있다.
대기실에서 뛰어나와서 내 우산을 자연스럽게 뺏어 들더니
같이 쓰고 갔던 사람도 있었고,
비 오는 날 버스킹 후 비 맞으며 정리를 하길래
내내 우산을 씌워주며 따라다닌 사람도 있었고,
베이스총 기타총 대신 바닥에 있던 내 우산을 들어 쏘던 사람도 있었고,
공연 끝나고 걸어가는데 우산 속에 뛰어들어오더니 지하철까지 씌워달라던 사람도 있었고,
칠렐레 팔렐레 들고 다니던 내 우산을 차곡차곡 접어 말아주던 사람도 있었다.
신기하게 앨범커버에 내 우산과 똑같이 생긴 우산이 있어 나중에 비슷한 컨셉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해놓고 안 찍어준 사람도.
그날도 분명히 비가 내렸었다.
나란히 우산을 쓰고 걸었던 기억도 있다.
근데 그날 내가 썼던 우산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했었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음료를 마셨는지.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이상하리만치 잘 기억하는 나인데도
그날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아마 내 신경은 온통 너였나 보다.
오늘 비가 갑자기 내리면 꼭 예쁜 우산을 살 거다.
아무 기억도 묻어있지 않은
혹시나 내가 잊은 어떤 기억이 묻어있을 가능성도 없는,
매일 들고 다니고 싶을 만큼 예쁜 우산을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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